음식점은 ‘밥’만 주는 곳이 아니다. 맛도 주고, 힘도 주고, 추억도 준다. 세상살이가 힘들 땐 단 밥이 입에 들어가도 씁쓸한 맛을 낸다. 뜨거운 국밥을 앞에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 거친 손을 떠올리기도 한다.
젊은 시절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에 풋고추 한 입 깨물며 힘을 얻었던 기억도 있다. 한일관. 1939년 화선옥이란 상호로 문을 연 뒤 3대를 이어온 곳이다. 70년 세월 동안 할아버지 손을 잡고 왔던 꼬마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손자 손을 잡고 오는 손님도 있을 게다.
최루탄 가스로 콧물을 흘리며 갈비탕을 먹었던 사람도 있었겠고, 고시에 붙어 불고기가 올라온 축하의 밥상을 받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 한일관은 음식점 이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 한일관이 청진동 재개발에 밀려 종로를 떠났다. 그리곤 최근 강남 신사동에 다시 문을 열었다. 성수대교 남단 호산병원 뒤편에 자리 잡은 ‘한일관 압구정점(02-732-3735)’.
화강암으로 지은 5층 건물에서 70년 세월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쑥한 모습이다. 다행히 음식 맛은 변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주방과 홀 서빙 직원 대부분이 고스란히 넘어왔기 때문이란다. 한일관의 대표메뉴인 불고기. 불판 테두리에 양념육수를 붓고, 불판 중앙에 불고기를 얹어 굽는 옛 스타일 그대로다.
단지 가스레인지 상자를 만들어 깔끔하게 정리했다. 짜지 않고 달달하면서 깊은 맛을 낸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물리지 않는다. 불고깃감은 국내산 육우의 등심 부위. 다른 집처럼 다릿살이나 볼깃살을 쓰지 않아 상당히 부드럽다. 1인분 200g에 2만5000원. 식사까지 가능한 불고기 정식의 경우엔 같은 양을 주면서 3만5000원을 받는다.
계절죽(흑깨죽)에서 탕평채, 구절판, 낙지볶음과 소면, 불고기와 식사로 이어지는 코스 메뉴다. 구절판은 먹기 편하게 밀쌈 위에 재료들을 나눠 담아 올려주기도 한다. 식사는 우거지탕·육개장·들깨버섯탕·된장찌개·골동반·만두탕·냉면 중에 한 가지를 고를 수 있다. 밥과 탕 그릇은 유기다.
탕 그릇 아래는 바닥에 열판을 깔아 내용물이 식지 않도록 배려했다. 여성은 들깨버섯탕, 남성은 육개장이나 우거지탕을 즐겨 찾는단다. 나 홀로 식사가 가능한 식탁,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별실 등 5층 건물 전체를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했다. 홀의 경우에도 식탁과 식탁 사이가 넉넉하게 떨어져 있어 말이 넘나들지 않고 편안한 식사가 가능하다. 피맛골 본점은 청진동 재개발이 끝나는 3~4년 뒤에 다시 열 계획이라고 한다.